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이런 퀴즈를 낸 적이 있다.
"삶은 뭐게요?"
나는 이 녀석이 뭐 이리 심오한 질문을 하냐 싶어서
나름대로 이런 저런 답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러다가 그럼 니가 생각하는 삶은 뭔데 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 녀석의 답은 '계란'이라는 것이다.
의아해진 내가 눈을 동그랗게 해서 되묻자,
"삶은 계란이지요."
아하, 하면서 웃었던 적이 있다.
-삶을 사는 방법-
부드러워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이라고 하는 똑같은 재료로 사람을 만들었지만,
각기 한 사람 한 사람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자면
유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 혼자서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랍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나 갈대처럼 유연하라, 삼목처럼 키가 커서도 안 된다.
갈대는 어느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와도 바람에 따라
휘었다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갈 수 있다.
바람이 없을 때도 자기의 위치에 서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삼목은 어떠한가.
북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도 쓰러질 것이고,
남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도 쓰러져 버릴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쓰러진 삼목은 원위치로 돌아오지 못하고 쓰러진 채로 있다.
또한 갈대는 '토라이'를 쓰는 펜으로 쓰이지만
삼목은 집을 짓는 재료로 쓰이거나 장작이 되어 타버릴 것이다.
이것은 유연한 생활을 해 온 갈대에게는 좋은 여생이,
경직된 생활을 해 온 삼목은 벌을 받는 결과이다."<탈무드>
내가 아는 분은 삶은 간단히 '느낌, 놀이, 마당'이라고 했다.
노자의 도덕경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1.곡신불사(谷神不死) 시위현빈(是謂玄牝)
즉, 골짜기의 신은 영원히 죽지 않으며, 이를 일러 현묘한, 또는 신령한 암컷이라 하며,
2.현빈지문(玄牝之門) 시위천지근(是謂天地根)
신령한 암컷의 문은, 이를 일러 하늘과 땅의 뿌리라고 하며,
3.면면약존(綿綿若存) 용지부동(用之不動)
가느다란 실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며, 쓰임이 있어도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노자의 이 유명한 말씀을 다시 재구성해서 설명해 놓았는데,
1.무형생명체(神)에는 영원히(死) 메꾸어지지 않는 빈 틈(谷)이 있으며, 이를 일러( 是謂)
아름다운 첫(玄) 창조의 문(牝)이라 한다.
2.무형생명체 알 속의 0,000...1%란 빈 틈(玄牝)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첫 문(玄門)이며,
0.000...1%의 빈 틈, 이를 일러(是謂) 하늘(天)과 땅(地)을 있도록 하는 바탕(根)이라 한다.
3.무형생명체는 가느다란 실(綿)처럼 떨림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나 보이지 않으며(若存)
유형생명체로 변화, 변환(用)되어도 그 떨림(動)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不).
계란을 삶아서 껍질을 벗겨보면 계란 한 쪽 끝이 오목하게 들어가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바로 이것이 생명체의 빈틈이라 했다.
0.000...1%의 빈틈이 있어야만 계란은 유형생명체로 변환하기 위한 움직임을, 즉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비유를 아주 마음에 들어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아들 녀석이 낸 넌센스 퀴즈가 얼추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토록 아름다운 무형생명체가 지닌 빈 틈을 여자의 자궁으로 곡해하는 오류를 범해 성행위를 통해 신선이 되거나 극락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긴 적도 있고,
중국 고서인 소녀경이란 책도 이런 노자의 도덕경 6장을 왜곡, 오해한 모체라고 한다.
무형생명체는 쉼없이 떨림을 유지하고 그 떨림의 유지는 0.000...1%의 빈틈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며
떨림의 실상은 빈 틈에 삼원빛이 쉼없이 들고 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생명체의 첫 출발은 무형생명체며,
무형생명체의 첫 출발은 떨림이며, 떨림의 첫 출발은 빈 틈이다.
그렇다면 무형생명체가 변환하여 이 땅에 유형생명체로 태어난 뒤에 삶의 첫 출발이 무엇일까? '느낌'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흰 옷을 즐겨 있었던 것도, 아이가 태어나면 흰 옷을 입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흰 옷을 입는 것도 바로 이런 연관성이 있다. 빛의 삼원색을 합한 색은 흰색이다.
흰색은 무형생명체, 즉 신의 존재에 있는 색이다. 신의 존재에서 와서 신의 존재로 돌아가는 곳, 첨과 끝이 같는 것이다.
인류 중에 왜 우리 민족만 유독 흰옷을 입고 장례를 치르고, 흰 옷을 즐겨 입었을까? 아마도 첨과 끝을 알고 있는 민족이지 않았을까?)
탈무드나, 노자의 도덕경이나, 내가 아는 분의 말씀이나
모두 빈 틈으로 인한 쉼없는 움직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느낌, 그 느낌이 살아서 움직이며, 느낌에 따라 움직이고,
느낌의 장을 열어 펼쳐 가는 곳이 이 '놀이마당'인 삶의 길이라고 결론지어 본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내가 간절히 바래서 이 곳에 있는 것이기에,
이왕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재밌게 놀이를 해 보자는, 그 느낌을 유지해 가는 것이다.
이런 느낌을 서너 번 가져본 적이 있다. 슬픈데도 기쁨의 눈물이 나는 느낌.
주변에 사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 너무 힘겨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볼 때 그걸 바라보는 내가 참 슬프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것이 우리가 간절히 바랬던 '삶의 놀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에서 뭔가 모를 희열이 올라오는 서글픈, 기쁨의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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