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일가족 학살 사건
2004년의 일이다.
잠귀가 밝은 나는 언제부턴가 동 틔기 전에 방 천정에서 보스락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 쥐의 침입이다라고 여겼으나, 우리 신랑은 쥐가 들어올 때가 없다면서 바람에 부스럭거리는 문풍지 소리라고 나의 의견을 일시에 묵살했다. 나도 그럴 것이 ‘그래, 들어올 때가 없지.’ 생각했다. 2002년에 입주해서 두 해 겨울 동안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나중에 생각된 것이지만 이때는 안방 외에는 난방이 안 되어 바깥기온과 동일했었다.-나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나, 연일 계속되는 그 소리가 하루는 동이 튼 다음 아침 시간이 시작되는 무렵에 들렸다. 해서 신랑더러 후래쉬를 들고 올라가 보라고 성화를 부렸다. 몇 분 후 신랑이 하는 말 “어, 진짜 쥐가 들어왔네. 어떻게 들어왔지. 에이 참.”하는 것이다. 두 마리의 쥐가 따뜻한 안방의 온기를 천정에서 만끽하며 신혼의 단 꿈에 젖어있었을 것이다. 이건 물론 나중에 미쳐진 생각이다.
나는 그 날부터 ‘찍찍이’, 쥐를 잡는 순간 접착제를 열심히 사 나르기 시작했다. 일단 비상용으로 비치되어 있는 찍찍이 하나를 천정에 올려놓은 10여 분 뒤에 이제는 바스락소리가 아니가 ‘턱터덕 퍽파박’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잡혔구나’하는 안도의 마음으로 신랑을 불렀다.
도시에서 일어나지 않는 시골에서만 벌어지는 많은 상황에 나는 늘 신랑을 최일선으로 내몰랐다. 시골에 가자고 선봉에 선 그 책임자에게 다 떠 넘기는 것이 되겠고, 신랑도 그걸 묵묵히 받아들이는 암암리에 성립된 우리 부부의 질서이다.
두 마리의 쥐 중에 한 마리가 잡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아마도 어디론가 나가버린 것 같았다.
그 후 안방 집 둘레를 여기저기 살펴보았는데 집 뒤 욕실의 석가래 나무 옆에 미처 흙을 못 채워넣어 나비 2cm에서 길이 5cm정도의 틈이 있었다.
당시 겨울이고 해서 진흙을 만들기도 뭣하고, 신랑은 적당한 돌을 하나 그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을 거다 생각하고는 예비적으로 ‘찍찍이’를 갖다 놓았었다.
잊고 지내다가 한참 후에 한 번 들여다보니 어른 새끼 손가락만한 생쥐 두 세 마리가 잡혀 있었다.
‘어어, 그럼 새끼를 낳았나.’하는 생각이 조금 들었지만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욕실 천정과 바로 연결되는 통로가 식품창고가 있는데 거기에는 적고 실하지는 않지만 한 해 농사한 것이 들어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직 도시 삶을 다 버리지 못한 주부로서 집 안에 쥐가 든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였다.
계속해서 새로운 쥐덫을 갖다둔 얼마 뒤 앞서 쥐가 잡힐 때처럼 큰 소리가 났다. 아마 큰 놈인가 보다 생각하면서 신랑이 가 보았는데 생쥐 두 마리가 찍찍이에 붙어 죽어있었고, 아마 어미인지 그 새끼를 보려다가 함께 쥐덫에 붙어진 것이다. 그런데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쳐 어떻게 어미는 달아났다.
‘도대체 어디로 또 들어왔을까’하면서 돌로 임시 막아둔 집 뒤 쪽으로 가 보니 끼워져 있던 돌이 빠져 있었다.
일단 한 번 추리를 해 보았다.
쥐 부부가 바람, 비, 겨울의 한파를 피해 따뜻한 보금자리를 물색하였을 수 있고, 덧붙여 임신한 부인을 위해 산후조리 장소를 찾았을 수도 있겠지.
아무튼 새끼를 낳았겠고, 아마 아비가 먼저 죽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일가족을 지켜야 된다는 수컷의 긴장과 흥분으로 쉽게 덫에 걸렸을 것 같고, 새끼들 생각에 흙벽을 기어올라가 수직으로 매달려 통로의 돌 부리를 빼내고 굶고 있을 새끼에게 다시 전신으로 다가서는 어미의 모성.
그래서 나는 일단 도망갔다가 나중에 찾아온 것이 어미라고 규정지어 봤다.
신랑도 마음이 씁쓸했지만, 나는 그 어미의 마지막에 보여준 모습에서 많은 착찹함을 느꼈다.
쥐를 죽이는 것이 파리. 모기네들처럼 당연하게 여겼고, 차츰 거기에 일로매진하여 진행했었는데 세월이 지났지만 언제나 쥐 가족 학살 사건은 두고두고 내 마음을 무겁게 하고 마음 한 컷에는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자식 중에도 꼭 가장 우성인자가 있듯이 그 뒤 단 한 마리의 생쥐가 살아남아 꽤 우리를 괴롭혔다.
천정에서 내려와 식품창고로 해서 창고 출입문으로 나와 싱크대 뒤 쪽으로 터전을 옮겼는지 콩알을 떨어뜨리면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여유까지 보였다.
이 녀석은 찍찍이에도 안 붙었었다. 곡식 앞에 찍찍이를 두면 그 뒤 쪽으로 가서 자루를 뚫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전 곡식을 항아리에 옮겼다. 지금도 미스테리 하나가 있다.
아는 분이 요구르트 한 줄을 주는 것을 비닐 째로 함지박 안에 넣어 두었는데 읍내에 갔다왔더니 그게 비닐 째로 없어진 것이다. 요구르트가 조금 흘려서 비닐에 약간 묻어 냄새가 나기는 했었다. 그래도 그걸 어떻게 물고 끌고 갔는지. 그리고도 그 녀석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한 40 알정도 남은 떡국을 그 날은 하필 소쿠리를 덮지 않고 단지 위에 올려 두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하나도 없었다. 기가 막혔다. 냉장고 뒤 쪽으로 �어보니 ‘내가 가져갔지롱’하는 식으로 떡국 한 알을 떨어뜨려 놓았다.
완전히 우리에게 철저히 복수를 하는 것 같았다.
이제 우리도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넘어 분노와 공포를 느꼈다.
우리의 고민을 마을 아주머님께 말씀드렸더니 약국에 가면 쥐만 먹고 죽는 쌀약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걸 최후통첩으로 뿌려두었다. 그 쌀약은 먹고나면 밝은 데 가서 죽는다고 했다. 인간은 참으로 끝없이 뭔가를 잘도 만들어낸다 싶었다.
다음 날 보니 이 먹성 좋은 쥐는 그것도 다 먹어치웠다.
그 해 겨울을 우리는 그 쥐 일가족과의 사투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 어미의 애절한 마음이 더러 생각에 미치면 결코 가벼운 마음일 수가 없었다.
그 때 일을 꼭 글로 써서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두고두고 사죄하고 싶었다.
2006년 12월 12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