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림재/세상살이 낙서장

비를 맞으며 기다림을 배운다.

방림재 2011. 7. 12. 15:52

올 봄 땅 속 깊은 곳에서,

일렁이며 용수철(Spring=봄)처럼 튀어오르는 봄의 열기,

그 곳에 나는 외로이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샘솟듯 올라오는 그 시점에 나는,

조바심으로 

틔우지 못하는 씨를 안고

홀로 평원의 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봄이 그렇게 나에게서 벗어나

어느 덧 열-음(여름)의 시간이 다가오고...

이제는 움켜진 씨를 놓아주려 한다.

 

해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저 그렇게 놓고 기다림을 기다린다.

 

비를 맞으며 서있는 그들에게서

기다림을 배운다.

 

산복숭아가 긴 비 속에서 이만큼 자라고 있었다.

아직은 그 어디에도 쓰임이 없지만, 그는 때를 알고 있다. 

 

모든 이들이 수련이 꽃을 피웠을 때 환호하고, 그저서야 수련의 존재를 알아준다.

그러나 정작 수련은 알고 있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전에 오랜 기다림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연초록의 고운 자태의 답싸리가 관상과 채종이 끝나면 뿌리째 뽑혀 처마밑에 꺼꾸로 매달리는 신세가 된다.

그렇게 말려지면, 요긴한 빗자루가 된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그가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때까지 그는 때를 기다릴 줄 안다.

 

 

꿩의 다리. 가여린 줄기와 잎.

특별하게 보이는 것이 없는 잡초처럼 보이지만

그도 한 송이 꽃을 피울 줄 아는 어여쁜 존재임을 언젠가는 만방에 알릴 날이 올 것이다.

 

산머루.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풋과일.

그러나 그 또한 기다릴 줄 안다.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음을.

 

일월비비추. 보랏빛 꽃이 보일랑 말랑,  성급하지 않는 때를 기다린다. 

아주 도도하고 멋스럽게.

 

올 봄 딱 한 줄기 떼어다가 이 곳 호박으로 터전을 옮겨주었다.

긴긴 장마비 속에서 잘 살아남아 식구를 이렇게 번창시켜 놓았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제 길을 걸어갈 줄 안다. 

 

나리꽃. 아직은 꽃이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세상이 결과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에만 치중하다 보면,

그것을 위한 긴긴 시간의 아픔과 기다림의 모진 공부는 자칫 외면되기 싶다.

 

이끼 속 채송화.

아직 채송화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아리따운 채송화가 될 운명이다.

그 언젠가는...

 

 

나는 아직 내가 잘 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마흔 넘은 사람들은 모두가 인생의 절반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쪽과 저쪽의 경계에 놓여져 있다.

그래서 지나간 시절의 회한과 앞으로에 대한 조바심에 조급하기 마련이다.

 

내가 잘 하는 것이란, 내가 혼의 상태에 있을 때 무엇을 가장 간절히 원해서 이 땅에 태어났을까?

망각 속에 있는 그 무엇을 나는 찾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 이왕이면 내가 잘 하는 것,

이제는 내가 해서 가슴 설레이는, 바로 이거야 하는 것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더 늦기 전'이란 것때문에 조바심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가슴 설레인다는 것은 무엇이든 첨 시작할 때, 아직 좌충우돌 우왕좌왕할 때

아직 배움이 미진할 때 무언가 모를 때 더 호기심을 자극할 때 그것을 가장 잘 느낀다.

예를 들어 연애도 첨 할 때 가장 가슴 설레이는 것이지, 모든 것을 다 알고 익숙해지는 결혼 중반이 되면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거기에는 설레임은 없다. 그저 심심함과 지루함이 유혹의 손길을 뻗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40대에 가장 바람을 많이 피우나 보다.

확실한 자신의 주관이 없으면 누구나 쉬운 길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나는 내가 뭘 잘 하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는데 이미 익숙한 것은 매력없어 보여 외면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미 잘 하고 있는 것을 버리지 않고 계속 해나간다면

언젠가는, 그 언젠가는

해답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 여름 장마비 속에서 나는 배웠다.

 

산을 오르고 내리고, 하는 것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평길을 묵묵히 걸어갈 줄 아는

기다림......